사람들이 말을 한다. 또 남의 일을 자기 일 같이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나는 잘 모르겠다는 말을 되뇌인다. 잘모르겠다. 왜 아픈지, 왜 힘든지, 왜 화가나는지, 묻고 싶지 않다. 왜인지 쏟아내는 글과 말들이 피곤하다. 나도, 나도 힘들다는 말에 묻힌다.

나는 왜냐는 말을 많이도 내뱉었던 사람이다. 왜요? 그러니까 왜요? 눈치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그렇게나 들었다. 네 말대로 난 눈치없는 사람이니까 끝까지, 이해가 안되면 될 때까지 왜냐고 물었다. 누구에게 물어도 돌아오는 대답은 늘 같았다. 왜긴 왜야, 몰라서 물어, 지금 반항하니, 뭐가 그렇게 불만이니. 궁금해서 물었을 뿐인데, 구석에 끌려가서 육두문자까지 듣고 나서야 나는 깨달았다. 보통의 사람들이 쓰는 왜냐는 말은 ‘싫은데요.’였다고. 왜 싫다는게 나쁜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더이상 시끄럽고 싶지 않아서 그후론 묻지 않게 되었다.

그렇게 나도 도통 익숙해지지 않던 ‘왜’라는 사회의 문법을 익혔다. 충분히 왜인지 말할 필요도 없었고 그러고 싶을 때에도 내 말을 듣고 싶은 사람은 없었으며 왠걸, 누군가 나에게 왜냐고 물어올 때면 늘 비난할 준비를 갖춘 채였다. 나에게도 그게 더 이상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는 내 표현의 오류를 지레 짐작하여 부끄러워한다. 이내 그 감정은 화로 변한다. 필요 이상으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다. 내 의견에 당신이 반대할 수 없는 이유를 뱉어댄다. 아무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날도 비슷했다.

우연히 들어간 캠페인단에서 처음 어떤 주제에 대해 자기 생각을 말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평소처럼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내 차례가 언제오는지만 기다렸다가 준비한 말을 꺼냈다. 다음 차례로 넘어가는 줄 알았더니

“음. 왜?”
*진행을 맡은 친구가 왜냐고 물었다. 당황했다. *“왜냐고?”

“응. 왜?”

마음에 안든다는거지, 지금. 나는 필사적으로 상대가 비난할 것 같은 항목을 짚어가며 대답했다.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그건 그래서라고. 이제 알겠냐고. 씩씩거리며 답을 마쳤다. 친구가 답했다.

“아~ 그래.”
*아, 그래? 뭐? 맥이 빠진 내가 멍하니 있자, 그 친구는 이내 다른 친구에게 물었다.
*
“이렇게 생각한다는데, 니 생각은 어때?”

니 생각? 그런건 생각지도 못했다. 내 생각이 이러면 이랬지 무슨 이야기를 더 듣는단거야. 또 다른 비난을 받는단 생각에 멍하다 못해 질려있었다. 그런데 더 맥이 빠지게도, 한 명씩 자기 이야기를 덤덤히이었다. 말이 끝날 때까지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말이 끝난 후에 어떤 평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그냥 모두 들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방금 누가 나에게 왜 그렇게 생각하냐고. 정말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서 또 듣고 싶어서 ‘물어주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서 모두 ‘들어주었다.’ 자신과 다른 생각을 말해도 공격할 필요도 방어할 필요도 없었다. 듣고 질문하고 물어보는 자리만 있었다. 처음으로 누가 솔직하게 말해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편안함 그대로, 다른 사람의 생각이 나와 달라도 괜찮았다.

커뮤니케이션

고백한다. 나는 말이 많이 서투른 사람이다. 관계에는 더 서투른 사람이다. 말을 뱉어놓고는 상대의 대답이 올 때까지 어찌할 줄 몰라 동동대는 사람이다. 까까오톡 문자 하나를 두고도 방송에서 보내냐 마냐 중계를 하는 것만 봐도, 아마도 이렇게 서투른 건 대한민국에 나뿐만이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꺼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것을 시작으로 나와 다른 상대의 생각을 들어도 편안해질 수 있을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말해본다면. ‘어떻게 생각하세요, 듣고 싶어요, 말해도, 괜찮아요, 들어줄게요.’

온라인

나는 내게 질문해온 친구같은, 꼭 그런 공간이 온라인에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오프라인보다 더 힘든 도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래서 더욱 인격의 민낯같은 온라인에서도, 그런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내가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을 때 편안하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어오는 공간.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는데, 넌 어때?”라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물어주는 곳. 상대도 솔직하고도 적의없이 말해준다. 나와 다른 의견에 처음엔 쉽지 않겠지만 그 친구의 말을 들을테다. 누가 나의 말을 들어주었던 것처럼. 어렵겠지만 내가 왜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는지 다시 한번 솔직하게 말해볼 수 있을테다.

더 많은 대화, 대화를 위한 대화

그 공간에서는 *우리는 달라도 괜찮다. 혹은 어쩌면 자신이 틀리고 아주 못된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단 겸손까지 이어질수도 있을거란 생각도 해본다. 비난 받으면서도 이해받을 수 있다는 마음을 갖길 바란다. *다시 한번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말한다. “괜찮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혹시 모를 자신의 오류를 시인하고 성찰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 과정으로 우리는 성장해왔다. 그렇게 대화함으로써 자신을 성찰할 수 있다면 자신은 절대 선이고 타인은 절대 악인 시선으로 함부로 재단하지 않도록 성찰할 가능성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런 공간이 있었으면 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내가 모르는 나의 오류를 알기 위해서, 그리고 당신의 생각을 듣고 싶어서. 그래서 대화를 위한 대화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괜찮다고 말해줄게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빠띠에서는 팀원이 함께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이번 글 쓰는 데에 도움을 준 책의 문구를 옮깁니다.
누군가를 이해할 가능성이 없다면 그 사람과 복잡한 상호작용을 시작할 계기도 훨씬 줄어든다. 우리는 수수께끼처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사람과는 진지한 일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스스로를 보호하도록 행동함으로써 손해 가능성을 최소화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동기를 되도록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상대방은 우리가 비협조적이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게 된다. (…) 각 집단의 구성원들은 자기 집단에 속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바람과 생각이 명확히 전달되도록 행동하지만, 다른 집단의 사람에게는 자신의 의견을 감추려 한다. 그래서 그 각각의 집단은 상대 집단을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집단들은 전부 이해하기 어려운 집단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제각기 상대가 자신들을 이해하지 않으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잔혹함에 대하여, 애덤 모턴. p.56
성찰성.
악의 이론은 우리가 어떻게 악으로 보일 수 있는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어야 한다. 애국자라고 자부하던 사람은 자신을 전범으로 보는 시각에 놀라고, 정당한 도리를 지켜왔다고 생각하던 사람은 자신을 편협한 인물로 보는 시각에 놀라며, 스스로를 사회의 생산적 구성원이라고 여기던 사람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의 불행에 책임이 있다는 시각에 놀란다.

. p.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