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기술을 활용한 사회 혁신의 가능성이 엿보인 사례가 있었다. 공적 마스크 배포 과정에서의 정부, 기업, 시민이 유기적으로 협력해 만든 앱이다. 정부는 약사들이 입력한 마스크 판매 이력을 중앙에 모아 마스크 재고 상황을 공공 데이터로 공개했다. 네이버, 카카오와 KT 등 기업은 재고 현황 데이터를 원활하게 공개할 수 있도록 서버를 제공했다. 민간의 시민 개발자(시빅해커)들과 관련 기업들은 마스크 재고 API를 활용해서 약국의 마스크 수량을 확인하는 앱을 개발했다. 약사들의 손으로 입력한 데이터가 시민의 손에 닿는 과정을 정부와 기업, 시빅해커가 공동으로 일주일도 안 되는 시간 안에 만들어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이렇게 빠르게 이루어졌을까? 중요한 데이터를 공개하는 것이 이롭다는 정부의 방침과, 재난 극복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 개발자들의 열정이 상호작용 했기 때문이었다.
오늘날 디지털 기술은 민주주의를 혁신하는 수단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동시에 민주주의의 상징적 슬로건인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는 기술에도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공공재나 공유재로서 다수가 기술을 함께 소유한다. 누구나 쉽게 사용 가능한 기술을 만든다. 기술에 영향을 받는 이들이 기술의 작동 방식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한다. 기술을 다수를 위해 활용해 더 안전하고 풍요로우며 지속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간다. 이런 낙관적인 전망에는 전제가 필요하다. 기술을 함께 소유하고, 누구나 활용할 수 있도록 만들며, 기술을 활용해 창출되는 부가 가치가 모두를 위해 활용되도록 민주적으로 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술의 민주적 구성이 중요한 까닭은 기술 활용의 낙관적인 전망의 이면에 있는 부정적인 가능성 때문이다. 예를 들면, 로봇으로 대표되는 생산 수단을 일부가 독점하여 극단적인 빈부격차가 생기는 사회나, 과도한 환경 파괴와 자원 남획으로 인류 및 생태계가 멸종위기에 처하는 기후 변화가 일어나는 사회도 우리는 예상하고 있다. 오늘날의 코로나19와 같은 상황도 기술로 인해 발생할 것으로 예견되는 미래 중 하나였다.
우리가 미래를 전망할 때 과학 기술을 늘 원인이자 해결책으로 지목한다. 대전염병이 인류를 멸망시키거나 최소한 지금보다는 한참 퇴보한 사회를 만들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기술 발달로 인해 초-연결된 사회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한편 물리적 거리두기에도 사회적 연대를 유지하는데 초-연결의 기술을 활용하기도 한다. 기술이 원인이자 해결책으로 지목되고, 그 기술에 판단이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친다면, 다수가 참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기술에 접근하는 순서를 바꾸어야 한다. 지금까지는 최첨단 기술이 펼쳐질 미래를 상상할 때, 기술의 활용 가능성을 먼저 생각하곤 했다. 이제는 기술이 다수를 위해 활용되도록, 기술을 함께 소유하고 기술에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하도록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야 한다. 기술의 발전이 민주주의와 함께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원칙들에 대한 지속적인 합의와 실천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와 함께 기술이 발전하기 위한 6가지 원칙
- 누구나 쉽게 접근과 사용이 가능하도록 기술 개발
- 정부 및 기업 데이터를 모두가 활용할 수 있도록 개방하고 공유
- 특별한 소수가 아닌 평범한 다수를 위한 플랫폼 서비스 제작
- 플랫폼에 가치를 더하는 사람들을 플랫폼 운영 및 소유에도 참여 유도
-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기술의 작동 원리를 투명하게 공개하고 주요 정책을 시민과 함께 결정
- 코딩 등의 기술 활용 교육을 넘어서 시민 누구나 기술 이해와 비판 역량을 갖추도록 교육
모두를 위한 기술을 기대한다면 모두에 의한, 모두의(가 함께 소유하는) 기술이 더 많이 필요하다.
대화를 할 필요가 생기면 화상으로만 이야기를 나눈다. 고도로 발달한 로봇이 필요한 모든 물품을 생산하고, 시설을 관리하기에 더 이상 인간의 노동은 필요하지 않다. 집단을 이루면 갈등으로 인해 내 의지를 꺾거나 상대의 의지를 꺾어야 하는 일이 생기니, 자원과 권한을 둘러싼 갈등이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의 거리를 두고 행성 전체의 인구도 섬세하게 관리한다. 아이작 아시모프가 SF소설에서 묘사한 ‘솔라리아’란 행성의 모습이다.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면서, 서로를 혐오와 두려움으로 느끼는 동시에 최첨단 기술로 원격 근무를 실험하며 안락함을 느끼는 사람이 늘어나는 지금의 우리 사회는 '솔라리아'를 닮아가게 될까? 그러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SF 세계에서 ‘솔라리아’는 인류가 우주로 나가면서 개척한 행성 중 마지막 50번째였고, 나머지 행성들은 각각의 상황에 따라 다른 삶의 방식을 만들어갔다. 미래의 가능성은 우리에게 다양하게 열려 있다.
하지만 잠깐 스스로에게 질문을 해 보자.
이 글을 읽는 바로 당신은 당신과 후손들이 살아가게 될 미래를 과학과 기술이 선택하는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가?
영향을 끼치기 위한 장치와 제도, 토론과 논쟁이 지금 충분하게 가능한 환경인가?
앞서 얘기했던 시빅해커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마스크 앱 개발에 참여한 시민은 중학생부터 대학생, 스타트업 개발자 등 다양했다. 다양한 오픈소스와 간편한 기술 인프라에 더해 공공 데이터가 적극적으로 제공되어 누구나 마스크 재고 앱 개발에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빅해커들은 자신들의 기술로 재난으로 발생한 문제를 사회가 해결하는데 기여할 수 있어 보람을 느꼈고, 정부가 적극적으로 데이터를 공개하고 누구나 참여 가능한 기반을 제공하는데서 정부에 대한 신뢰를 느꼈다고 말했다. 시민의 디지털 역량이 커지고, 공공의 디지털 자원이 보편적으로 접근 가능할 때 사회가 문제를 다루는 방식도 달라지고 서로에 대한 신뢰도 커진 것이다.
<노동 없는 미래>를 쓴 팀 던럽은 기술 발전으로 노동이 필요하지 않은 사회를 제시하면서도 마지막에 이렇게 덧붙였다. “만일 소수가 원하는 것들보다는 다수가 필요로 하는 것들에 응하는 정부를 재창조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모든 걸 포기한 채 새로운 로봇 지배자들을 환영하고, 남부럽지 않은 중산층의 삶을 살 기회가 싹 사라져 버린 세상, 그리고 그들과 우리로 갈라져 대립해야 하는 세상에 적응하는 수밖에 없다”라고. 불행한 미래가 다가오기 전에 기술을 둘러싼 거버넌스를 구축하고, 공공과 사회가 공유하는 기술을 늘려나가야 한다. 다수를 위한 디지털 기술 기반의 사회 혁신이 작동하도록 다수의, 다수에 의한, 다수를 위한 기술을 만들고 그에 필요한 환경 구축에 나서야 할 때다.
글 | 빠띠 민주주의랩 시스 rest515@parti.coop
이노소셜랩 '기술을 활용한 사회혁신의 전제 - 기술은 어떤 미래를 꿈꾸는가'에 기고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