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은 민들레(https://www.mindle.org/)에서 진행하고 작성한 인터뷰 내용이며, 민들레 131호 '코로나 시대, 우리는 연결되고 싶다'에 실린 내용입니다.
민주주의 활동가들의 커뮤니티, 빠띠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국가다. 나이, 성별, 장애 여부, 소득 격차 등에 상관없이 모두가 민주주의를 경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따금 경험하는 투표 외에 시민이 주체적으로 만들어가는 민주주의를 얼마나 접하고 있을까?
민주주의를 일상에서 실현해갈 수 있도록 참여의 장을 만드는 이들이 있다.
‘민주주의 활동가들의 커뮤니티’라 불리는 ‘빠띠Parti’다.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시민이 자유롭게 의견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온라인 플랫폼을 개발하고, 시민의 참여를 유도하는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이들이 바라보는 방향은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이 민주적인 의사결정에 참여해 정치뿐 아니라 일터, 학교 등 일상생활 속에서 민주주의 문화가 자리잡는 것이다.
빠띠의 설립자인 권오현 대표, 시민들과 협력적 커뮤니티를 만들고 있는 장하은 활동가를 만나 ‘더 많은 민주주의’ ‘더 나은 민주주의’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취재·정리 이수진
속기록 정모경
민주주의 활동가들의 협동조합
빠띠 홈페이지에 들어가면 “더 민주적인 세상을 만드는 민주주의 활동가들의 협동조합”이라는 문구가 제일 먼저 눈에 띄어요. 빠띠는 어떤 일을 하는 곳인가요?
권오현 : 우리 사회 곳곳에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혁신적인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2015년에 빠띠를 설립했어요. 온라인 플랫폼을 만들고 기획과 운영도 함께하는 협동조합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었죠. 시민의 손으로 선출직을 뽑는 선거 참여를 넘어 내가 몸담은 곳이 더 안전한 신뢰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민주주의의 개념을 확대하고 싶었어요. 내 의견을 이야기하는 것에서 나아가 서로의 의견을 듣고 조율해서 더 나은 대안을 만들어내는 ‘신뢰와 협력의 민주주의’를 만드는 게 평생의 목표였거든요.
이 일을 전업으로 하는 구성원들은 커뮤니티, 공론장, 시민참여 플랫폼, 데이터 등 팀별로 중요하게 여기는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그 외에 프로젝트별로 협업하는 분들이 ‘협력가’란 이름으로 함께하고 있고요. 구성원과 협력가를 포함해서 ‘사회를 민주적으로 만들려는 민주주의 활동가’라고 저희 나름대로 정의를 내리고 있죠.
선거 참여를 넘어 일상에서 주체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세상이 ‘더 민주적인 사회’라 보고 계시군요. 디지털 기술을 민주주의와 연결한다는 생각이 흥미롭습니다.
권오현 : 디지털 기술은 데이터를 축적해 분석할 수 있고, 그것을 시간과 공간을 넘어 쉽게 연결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어요. 디지털 기술을 통해 정보를 잘 축적해놓으면 전체 맥락을 파악하기가 수월한데요. 이는 더 많은 참여로 이어질 수 있게끔 도와주는 역할을 해요.
20년 전만 해도 공보물 외에는 정치인에 대해 알 수 있는 통로가 없었지만 지금은 인터넷 검색만 하면 알 수 있고 많은 정보를 공유하기도 쉬워졌어요. 디지털 기술은 기존에 하지 못했던 여러 일을 동시에 진행하면서 동시에 협력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에 투표를 통해 의견을 모으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어요.
빠띠에선 ‘더 많은, 더 나은 민주주의’라는 말을 자주 쓰는 것 같아요. ‘일상의 민주주의’라는 표현도 눈에 띄고요. 빠띠가 생각하는 일상의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요?
권오현 : 기존의 민주주의가 안고 있는 투명하지 않은 의사결정, 민주적 소통의 부재, 작동하지 않는 공론장, 루머와 허위조작 정보 같은 문제들을 해결하려면 다른 방식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 있었어요.
‘더 많은 민주주의’는 시민의 권리와 주권을 확대해 독점과 엘리트주의를 극복할 수 있고, ‘더 나은 민주주의’는 시민의 안전과 자유, 신뢰와 협력의 기반을 만들어 혐오와 갈등을 극복하고 형식적 민주주의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해요.
빠띠도 민주적인 조직을 만들기 위해 몇 가지 규칙을 세웠어요. 협동조합 형식으로 조직을 공동 소유하는 것, 플랫폼 도구를 오픈소스로 공유하고 작업물을 공개하는 거예요. 나중에는 플랫폼에서 발생하는 수익을 사용자들과 나누는 방법도 시도해보고 싶어요. 조직, 작업, 성과를 공유하고 시민들과 함께 소유해야 민주주의를 만드는 빠띠 역시 민주적으로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장하은 : 시민과 서울시가 함께 정책을 만드는 ‘민주주의 서울’을 진행할 때 ‘일상의 민주주의’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민주주의 서울’은 작년까지 서울시와 빠띠가 협업하며 만들어간 시민참여 플랫폼인데요. 시민들이 자기 삶 속에서 여러 가지 제안을 할 수 있게 다양한 활동을 했어요. 서울시 공공자전거인 ‘따릉이’의 헬멧 의무화에 대한 토론을 열었을 때, 3천여 명의 시민들이 참여해 열띤 토론을 벌인 결과 헬멧 비치 사업이 일단 유보된 것도 그런 예죠. 이외에도 육아, 플라스틱, 놀 권리 등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의제들로 정책 제안에 참여해 민주주의의 역동성과 시민의 효능감을 높이고 있어요. 궁극적으로 여러 플랫폼을 통해 구현하고 싶은 모습은 기업이나 정부 등 커다란 조직 안에서 시민의 역동이 더욱 활발히 일어나 조직이 민주적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민들레 129호를 준비할 때 빠띠의 온라인 플랫폼인 빠띠 그룹스 ‘쓰레기덕질’에서 제로 웨이스트에 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온라인에 제안하고 토론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오프라인에서도 쓰레기를 줄이기 위해 활동한다는 점이 인상적이었어요.
권오현 :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가 생각보다 복잡하기 때문에 의견을 내는 것만으로는 변화를 꾀하기 쉽지 않지요. 시민들이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필요한 활동을 쉽게 바로 할 수 있게 세부적으로 나누어 플랫폼으로 구성했어요. 행정이나 조직의 변화를 유도하는 캠페인을 열고, 하나의 의제가 나오기 전에 숙성될 수 있도록 안전한 공간에서 이야기를 주고받는 커뮤니티를 만들고, 이해관계자와 소통하지 않는 기관들을 상대로 이슈파이팅을 만들어내는 등 각각의 활동이 연결되어 작동해야 실질적인 변화를 만들 수 있어요. 공론장 플랫폼인 ‘빠띠 믹스’ 같은 경우는 특정 의견에 대한 찬성, 반대를 비롯해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공론화 토대를 탄탄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에요.
디지털 기술에 대한 다른 생각이 필요한 때
Z세대’ 는 태어나면서부터 디지털 기술에 익숙한데요. 기술 활용에 대한 방향이 완전히 왜곡될 때 ‘N번방’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이미 디지털 기술을 가진 Z세대가 시민성을 기르고 민주주의를 경험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무엇일까요?
권오현 : 디지털 시민성을 기르는 일은 제도와 기술 없이 교육만으로는 해결하기 힘들어요. ‘시민들이 더 많은 권한을 갖고 함께 결정하자’는 쪽으로 디지털 시민성의 방향을 설정해야 하는데 지금으로서는 더 많은 경험과 신뢰, 제도적 장치와 기술이 필요해 보여요. 이를테면, 온라인에서 혐오발언 금지해야죠. 얼굴이 보일 때는 안 된다고 하면서 얼굴 안 보이는 데서는 허용하는 것 자체가 바른 방향이 아니니까요.
한편으로는 혐오와 착취를 방지하는 기술을 만들어 시민들이 잘못된 행위를 감시할 수 있어야 해요. 지금까지는 디지털 기술을 산업 발전 도구로만 활용해왔지 일상 속의 민주주의를 만드는 도구로 쓰지 못했어요. 웹하드 사업자들이 아동 성착취물을 올리고 수익을 낼 때도 디지털 기술을 통해 충분히 걸러낼 수 있었어요. 영화나 영상 저작권을 보호하기 위해 기술을 활용하는 기구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알고 보니 그 기구를 웹하드 사업자들이 운영하고 있었죠. 그런 기술을 관리할 수 있는 시민들이 많았다면 범죄를 사전에 차단할 수도 있었을 거예요.
우리 사회가 기술을 만들고 활용할 때 그것을 투명하게 운영하는 기구, 시민단체가 많아질 수 있게 노력해야 해요. 조금만 살펴봐도 디지털 관련 단체 중 공적이거나 기술 관련해 시민이 소유한 기구가 거의 없다는 걸 알 수 있어요. 지금까지는 문제를 방지하는 기술을 개발할 수 있게 공공이 지원한다거나, 그 일을 IT 산업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아요.
최근 선거 연령이 만 18세로 조정되면서 시민교육, 학교 민주주의에 대한 중요성이 커지고 있어요. 학교 민주주의나 청소년의 정치 참여와 관련해 빠띠와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장하은 : 지금은 광주청소년삶디자인센터1와 함께 기획형 청소년 주도 프로젝트 ‘빠띠 민주주의활동가학교’를 진행하고 있어요. 빠띠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 커뮤니티, 공론장과 플랫폼을 청소년들과 하나하나 경험해보는 시간이죠. 이 활동을 통해 청소년이 민주주의와 기술의 연관성을 이해하고 사회의 더 다양한 면을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면 좋겠어요.
권오현 : 학생들이 목소리를 내면 교사나 교육 당국은 목소리를 듣거나 듣지 않는 식의 구조를 벗어난 다음 단계의 상상이 필요한 것 같아요. 그런 의미에서 빠띠는 공론장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요즘의 미디어는 숙의와 협력이 일어나는 공론장으로 적합하지 않은 것 같아요. 오히려 서로 목소리를 더 높이기에 몰두하고 자극적인 발언에 사람들을 모아주는 역할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죠.
플랫폼에서는 발언자도 중요하지만 발언자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생각이 더 중요해요. 발언자의 전문성과 관점이 다수의 사람에게 수용될 때 사회가 변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자기가 낸 의견에 대해 다수의 신뢰를 얻고 숙의 과정을 거쳐 조정과 협력을 이뤄내는 역량을 갖추는 훈련을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빠띠가 그리는 더 나은 민주주의
코로나19 팬데믹을 겪으면서 비대면 방식에 대한 시도가 많아졌어요. 가능한 기업은 재택근무를 시작했고 학교 역시 온라인 수업이 이어지고 있고요. 설립 때부터 전원이 원격근무를 하는 빠띠는 떨어져 있는 동료와 함께 일한다는 감각을 어떻게 유지하고 있나요?
내부적으로 민주적인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기술 '빠띠 그룹스'
장하은 : 코로나19 이후 많은 분들이 원격근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문의하셨어요. 빠띠 원격근무의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신뢰와 협업’이에요. 신뢰의 기반을 만들기 위한 대표적인 업무로 분기별 소통이 있어요. 하루, 일주일, 한 달 분기로 논의를 나누어요. 이를 ‘항해일지’라 부르는데, 여기서 과업에 대한 논의뿐 아니라 구성원의 생각과 감정도 나누고 있어서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동료와 함께 일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 같아요. 빠띠는 가이드를 좋아하는 편이에요. 이를테면, ‘행정문서 처리하는 법’ 같은 가이드를 함께 만들고 실험하면서 발전시키는 거죠. 새로운 구성원이 오면 이전 조직과 문화가 달라서 적응 시간이 조금 걸리기는 하지만 항해일지를 반복해서 쓰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협업이 가능해져요. 모든 구성원의 원격근무는 한국에서 드문 사례가 아닐까 싶어요.
디지털과 민주주의의 연결이라는 새로운 모델인 빠띠를 꾸려오면서 기억에 남는 활동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권오현 : 빠띠를 시작할 때만 해도 민주주의를 더 넓고 깊게 바라보자, 일상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려면 커뮤니티를 비롯한 공론장, 데이터나 시빅해킹2 등이 중요하다는 말을 쉽게 공감받기 어려웠어요. 하지만 몇 년 지난 지금 ‘일상의 민주주의’라는 말이 사회 곳곳에서 들리고, 분야별로 자체 플랫폼과 툴킷toolkit3을 갖춘 빠띠의 팀들이 여러 기관과 협력하는 걸 보면 신기하고 감격스러워요.
장하은 : ‘민주주의 서울’에서 시민들과 워크숍을 할 때 들었던 말이 생각나는데요. “민주주의, 정책 제안이 멀고 어렵게만 느껴졌는데 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 내 의견을 제안할 수 있다니 신기하다” “살면서 이런 느낌을 느껴보지 못했는데 주인의식을 더 갖게 된 것 같다”는 소감을 나눠주었어요. ‘나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던 개인이 일상에서 민주주의를 경험하게 된 과정을 곁에서 함께하며 뿌듯함을 느꼈죠.
올해는 코로나19, 태풍 등 재난을 연달아 겪고 있어요. 앞으로 더 심해질 거라고 예측하기도 하고요. ‘재난사회’ 속에서 민주주의 확장을 위한 빠띠의 역할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요?
권오현 : 올해 초 마스크 대란이 있을 때 빠띠의 제안으로 정부가 가지고 있는 데이터를 공개하고 이를 활용해서 약국별로 공적마스크 재고 현황을 보여주는 어플리케이션을 개발했어요. 데이터 개발에 참여한 사람들은 재난을 극복하는 데 자신이 가진 기술이 활용되었다는 효능감과 공동체에 기여했다는 뿌듯함, 정부에 대한 신뢰를 경험했다고 해요. 개발자들이 함께 모여서 사회문제를 다뤄본 경험도 처음이었는데 즐거웠다 하고요. 재난을 극복하려면 정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주도적으로 협력하는 시민의 힘, 즉 민주주의가 정말 중요하다는 걸 느꼈어요.
'민주주의 서울' 시민제안 워크숍
몇 년 전까지는 기술을 활용해서 ‘민주주의가 더 발전하면 좋겠다’는 목표가 있었다면, 이제는 ‘어떻게 더 좋은 민주주의를 만들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구하는 과정인 것 같아요.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는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안전한 커뮤니티, 의견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캠페인, 중요한 이슈를 논의하고 정책으로 만드는 공론장, 시민이 데이터를 만들고 활용하는 역량을 갖추도록 돕는 공익 데이터 사업을 더 활성화하는 것이에요. 이들 사업에 필요한 플랫폼과 툴킷을 만들고, 정부를 비롯한 여러 기관과도 시민이 주도해 협력하는 공간을 더 만들려고 합니다. 민주주의 활동가들도 더 많이 초대하려고 하고요. 더 민주적인 사회로 변화하는 데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우리가 개발한 플랫폼과 여러 노하우를 정말 쓸모 있게 만드는 게 빠띠의 남은 숙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