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마워, 너는 좋은 거품목욕이었어>

일 하는 걸 좋아하지만(뭐든 일로 만드는 걸 좋아하는 사람), 일이 감당할 수 없이 몰아치는 상황까지 좋아하는 건 아니다. 내가 조정할 수 있는 선에서, 내가 하고 싶은 방식으로, 완성도 있게 끝낼 수 있는 시간 동안 하는 걸 좋아한다. 여기까지 읽으면 알겠지만, 이런 경우가 찾아오는 때는 거의 없으므로, 일을 좋아하지만 일이 감당할 수 없이 몰아치는 상황 속에서 일을 해서 결국 일에 질리고 만다. 그렇다면 나는 일을 좋아하는 것인가 아닌가...음?

이런 철학적인 고민은 뒤로 하고, 오늘 하고 싶은 얘기는, 이런 내 현실을 회피하기 위해 지출한 올 한 해 돈지랄(a.k.a 시발비용)에 관한 것이다. ‘내가 돈을 버는데 이것도 못해?’라는 이상한 생각이 올라오고, 고민의 여지 없이 지갑은 털려있었던 2017년의 나. 후회를 남기긴 하지만 그래도 내 일의 동반자, 내 지갑을 망치러 온 구원자인 돈지랄을 소개한다.(*물론 매일 하기 때문에 330가지 정도 되지만, 기억에 남는 한 가지를 소개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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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올 해 봄. N잡러인 나는 두 개의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데, 두 회사 모두 일이 많았던 시기였다. 뿐만 아니라 프로젝트로 하고 있는 와일드블랭크프로젝트에서 가방을 만들어 팔고 있었기 때문에 집에 와서도 쉴 수가 없었다.

한 회사에서 스토리펀딩을 시작하기 위해 세팅 중이었고 PM을 맡았는데, 그 초기 작업이 쉽지 않았다. 파트너사와 같이 진행하던 프로젝트라서 글을 쓰고 세팅한 뒤에 양쪽 모두의 확인을 받아야 하는, 커뮤니케이션 잔치가 열리고 있던 중, 겨우 세팅이 되었고, 다음날로 바뀌는 12시에 첫 글이 오픈될 계획이었다. 우리팀과 파트너사가 자리 잡고 앉아서 12시만을 두근두근 기다렸고 12시가 땡, 했는데 글쎄 글이 올라오지 않는 것. 음, 이건 뭘까? 싶어 담당자에게 실례를 무릅쓰고 메신저를 보냈다. 알고보니 12시에 대한 기준이 서로 달랐고, 담당자분이 ‘확인했어야 하는데 죄송합니다’를 얘기하는 카톡창을 멍하니 바라봐야 했다. 오픈을 기다리고 있는 팀과 파트너, 랜선으로 연결되어 깨어있는 그들에게 죄송함을 10가지 정도의 방식으로 표현한 뒤, 상황이 마무리되었고, 나는 ‘아 왜살지’의 마음이 되어 쓸쓸히 방안에 남겨졌다.

자려다가 갑자기 미치도록 거품목욕이 하고 싶어졌다. 내가 열심히 일했는데 왜 거품목욕도 못해! 라고 생각하게 되었고, 당장 할 수 없었다. 왜냐면 우리집엔 욕조가 없...흑흑. 호텔에 가면 수영도 하고 거품목욕도 하고 바삭바삭 소리 나는 침구에서 잠을 퍼잘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호텔 앱을 켜서 집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호텔을 미친듯이 찾았다. 수영장이 있고 욕조가 있고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텔을 결제하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고, 나를 위해 돈을 쓴 나를 칭찬하며 잠이 들었다.

문제는 아침에 발견되었다. 그리 호텔에 가지 않아도 될 것 같은 기분과 컨디션이 되었기 때문이다(회복탄력성 좋은 사람). 그 돈으로 하고 싶은 다른 것들이 생각났다. 예를 들면 옷을 산다든지, 마사지를 받는다든지, 둘 다 한다든지, 뭐 그런 것. 취소를 하기 위해 앱을 열었고, 약 만원을 아끼기 위해 취소가 되지 않는 특가 할인을 선택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니, 발견했다기 보다는 애써 부인했지만 내가 그랬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것. 시발비용을 이렇게 지출해버린 나 때문에 회복되었던 컨디션은 다시 안 좋아졌고, 후회로 점철된 하루를 또 보냈다. 아, 왜 살지.

하지만 모든 이야기의 결론이 그렇듯, 행복하게 주말을 즐기고 돌아왔다(또 회복 탄력성이 좋음). 거품목욕도 하고 나보다 수영을 2657배 잘하는 할머니 스위머와 둘이 넓은 수영장을 쓸 수도 있었다. 늦잠을 자고 천천히 체크아웃을 해서 집에 가서 또 잔 것은, 당연한 일인가?

써도 후회, 안써도 후회하는 시발비용이라면, 나는 나를 위해 쓰는 2018년이 되겠다고 다짐해본다. 사실, 내가 나를 위해 뭔가를 하는 기회나 시간은 많아보이지만 또 그렇지 않으니까. 그때 그때 내게 필요한 걸 파악하고, 일을 열심히 하거나 누군가를 위해 애쓴 나를 돌보는 일에 ‘시발비용’이라는 말이 붙는다면 나는 기꺼이 시발비용을 쓰겠다고. 물론, 파산을 하면 곤란하지만 나는 그런 돈을 쓸 만큼 배포가 큰 사람은 아니(...ㄹ까 과연?)니까,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