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떠나보니 나도 나를 조금은 알겠더라>
10년을 꿈꿔온 세계 일주, 30살이 되어 현실로 이루었다. 현재 여행 12개월 차, 한 달 있으면 집에 간다. 지난 1년간 길 위에서 대부분 홀로 보내며 자신을 조금은 알게 됐다.
첫 번째, 나는 참 사람이 좋다. 내성적 성격이라 중, 고교 시절에도 친구가 많이 없었다. 대학에 와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전공 특성상 팀별 과제는 많지 않았다. 대학 졸업 후, 취업실패로 창업을 궁여지책으로 선택했다. 엄마와 같이 가게를 운영하긴 했지만, 대부분 홀로 일을 했다. 나는 혼자 인 게 익숙하고 편했다. 5년 동안 불특정 대중을 상대하는 서비스업에 종사하면서 사람에 질려 버리기도 했다.
1년을 길 위에서 보내며 가족도, 친구도 없이 진짜 홀로 지내보니 사람이 그리워 미칠 지경이 되었다. 여행길에서 아무도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호스텔에서 만난 다른 여행자들, 자원봉사 현장에서 만난 현지인들, 우연히 마주친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속 이야기를 터놓기는 어려웠다. 계속되는 짧은 인연이 무의미하게 느껴지며, 한국에서 매일 일상을 나누던 가족, 친구, 지인들이 가슴이 미어지도록 보고 싶다. 나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 내 속 이야기를 털어놓아도 될 정도로 믿을 수 있는 관계가 필요하다. 이제는 혼자 이고 싶지 않다. 혼자 밥 먹기, 혼자 여행하기, 혼자 일하기, 혼자 놀기……. 난 이제 혼자인데 지쳤다. 사람이 최고로 좋다.
두 번째, 나는 욕심이 많다. 내 본명의 뜻은 ‘빼어나게 빛나라’ 이다. 이름 탓일까, 난 유난히 하고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관심 가는 것도 많다. 그 덕에 세계 일주를 떠난 셈이기도 한다. 모든 여행자의 꿈이라는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에 한 번쯤 꼭 가보고 싶어 다녀왔다.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쓰레기 없는 친환경 생활을 한다는 사람이 있어 기어코 인터뷰를 (그것도 영어로)해냈다.
이렇게 하나둘 욕망을 이루어가는 거면 좋은데, 내 욕심이 때로는 과해져 남과 비교를 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된다. 국제기구를 다니는 친구와 나 자신을 비교하며, “왜 난 30살에 아직도 직업도 직장도 없이 이러고 있지?” 싶고, “나도 *** 작가처럼 되면 좋겠다. 근데 나는 그런 재능이 없잖아”라며 좌절에 빠진다. 여행하면서 욕심으로 괴로워하는 내 자신에게 되뇌고 있다. “큰일 하지 않아도 돼. 내 이름의 무게 따위 신경 쓰지 말자. 작은 일, 작은 행복에 만족하자.”
세번째, 내게 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성취감’이다. 여행을 떠나기 전 5년 동안 운영한 가게는 경제적으로는 대성공이었다. 사업 1~2년 차에는 일이 참 재미있었다. 가게가 자리 잡도록 내 두 발로 뛰면서 고객과 얼굴을 마주했고, 시장조사를 하며 열정을 불태웠다. 3년 차쯤 되자 가게는 안정에 접었고, 그 이후 매일 같은 하루가 반복됐다. 통장은 두둑해졌지만, 일을 통해 나는 아무것도 더 배우지 못했다. 사회 초년생인 내가 누구의 지도도, 도움도 없이 불특정 다수를 상대하는 일은 갈수록 어렵게만 느껴졌다.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손님과의 갈등은 빈번해지면서 성취감이 ‘0’에 이르렀다. 매일 ‘지겨워, 떠나고 싶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사업이 정체기에 이르렀을 때, 창업 전문가의 도움이라도 받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지금 와서 든다.
네 번째, 지금의 나는 단독적인 시골 생활은 무리다. 여행을 떠나기 전 나는 귀농, 귀촌에 상당한 관심이 있었다. 여행을 떠나온 후 여러 형태의 농촌 생활을 체험했다. 인터넷도 안 터지는 볼리비아 산골에 사는 4인 가족을 도우며 스스로 살 집을 짓고, 농사를 지어봤다. 와, 진짜 힘들었다. 매일 6~7시간씩의 고강도 육체노동도 힘들었지만, 고립감이 너무 심했다. 이 집에서 깨달았다. 일단 나 혼자 혹은 몇몇 소수의 사람과 귀농, 귀촌하는 건 지금의 나에게는 무리다.
나는 외부세계와의 연결이 가능한 소도시나, 농촌에 살아도 교류가 활발한 읍내 정도에 사는 게 좋았다. 150명이 사는 덴마크의 농촌 공동체에서는 육체노동이 힘들었어도, 사람들이 좋아 지낼 만 했다. 물론 거기서는 인터넷도 마음대로 쓸 수 있었고, 버스 타면 30분 만에 소도시로 나갈 수 있었다.
다섯 번째, 나는 미니멀리스트로 살 수 있다. 1년 동안 내 가방은 12kg을 넘어본 적이 없다. 그나마도 여행 후반에 이르니 10kg도 채 안 된다. 한국에서는 샴푸와 린스를 썼지만, 여행 중에는 돈을 아끼려 샴푸만 썼다. 막상 해보니 샴푸와 린스를 다 쓸 때와 머릿결에 별 차이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20개 정도의 귀걸이가 있었지만, 여행 중에 나는 귀걸이를 딱 한 쌍만 했다. 옷가지도 날이 갈수록 간편 해졌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베를린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한겨울이다. 내가 가진 옷은 스웨터 세 개, 외투 두 벌, 면바지 한 개, 청바지 한 개, 여름옷 상하의 각 한 벌씩, 수면 바지 한 개, 보온용 스타킹 한 개, 가을에 입던 블라우스 한 개, 멋내기용 원피스 하나, 속옷 상의 세 개, 하의 네 개, 양말 4켤레. 이게 전부다. 서울에서 지낼 때보다 월등히 적은 양이지만, 이렇게 살아도 생활에 아무 지장이 없다.
여섯 번째, 나는 잘 참고, 꾸준하다. 세계 일주 전 가장 길게 떠난 여행은 고작 2주. 여행이란 항상 신나고 재미있는 일인 줄만 알았다. 세계 일주를 떠난 사람들이 하는 말 “오래 여행하다 보면, 유적이나 박물관 같은 게 다 그게 그거 같아 보이고, 슬럼프도 오고 그래요”을 믿지 못했다. 그런데 막상 여행을 떠나보니 나도 그랬다. 사람 만나는 일이 최고로 기쁨과 동시에 유적이나 박물관은 가이드 없이 혼자서 볼 때는 정말 다 그게 그거 같아졌다. 우울증을 동반한 슬럼프가 수시로 찾아왔고, 불안한 생활 환경 탓에 불면증도 심해졌다. 여행 막바지인 지금, 집에 가고 싶다는 말을 자꾸 한다. 여행을 떠나기 전, 여행이 내 인생의 해방구이자 답인 줄 알았는데, 막상 이렇게 길게 떠나보니 여행 초반에 느꼈던 열정은 사라지고 여행이 오히려 익숙하고 때에 따라서는 반복되는 일상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왜 돌아가지 않았느냐고? 포기할 수 없어서였다. 중간에 슬럼프가 와서, 외로워서, 아파서 하는 이유로 돌아가면 난 죽도 밥도 안되고 자꾸 포기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스스로 안에 생길 것만 같았다. 그래서 목표한대로 1년을 채우자고 참고 또 참았다. 스스로 “세계 일주가 만만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난 내 두발로 16개국을 누비고 다녔어!”라는 자존감을 선물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포기할 수 없었다.
여행을 통해 내 자신을 속 시원하게 다 알게 된 건 아니다. 31살이 코앞인 나는 아직도 소위 말하는 ‘가슴 뛰는 일’ 혹은 최소한 금방 질리지 않고, 오래 ‘잘’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다. 누군가 “그래서 세계일주로 인생 전환이라도 된 거야?”라고 물으면 “글쎄?”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길 위에서 나는 묻고 또 물었다. ‘난 최선을 다하는 걸까?’, ‘내가 하는 여행이 무슨 의미이지?’ 외롭고 힘이 들면, 자기 의심이 이따금 솟아났다.
떠난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10년 동안의 꿈이었고, 이 꿈을 달성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었다. 그것만으로도 크게 만족한다. 내 자신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고, 내 인생에 보석 같은 추억을 잔뜩 만들어서 추억 부자도 되었다. 1년 동안 길 위에서의 시간이 내가 인생에 줄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