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뜻밖에 가장 먼 곳에 다녀온 이야기
사람이 안하던 짓을 할 때가 있다. 올 해 여름이었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마음 아픈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에서 일하던 인도인 이주노동자 분이 크게 다쳐 당분간 돈을 벌지 못한다는 소식이었다. 글쓴이는 그 분이 당장의 생계비도 없어 걱정이라고 말했다. 이상하게 그 글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결국 글쓴이를 통해 소정의 금액을 후원 했다. 그는 금액을 전달한 후 다친 이주노동자 분과 사진을 찍어 보냈다. 이주노동자 분이 내게 많이 감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사진 속 이주노동자 분은 웃고 있었다. 만나면 어떨까. 문득 궁금했다.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생각을 접었다. 나의 마음속에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려는 게 있는 지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몇 주 후 쉐인 클레이본이라는 신학자의 책 중 한 글귀가 눈에 들어왔다. ‘가난한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웃고 울고 꿈꾸고 갈등하는 참된 친구와 가족이 되는 것. 그것이 진정 아름다운 것이다.’라는 글귀였다. 이주노동자 분이 다시 생각났다. 처음 글을 올린 분께 방문을 해도 되는지 물어보았다. 그는 먼 길 와야 하는데 괜찮겠냐고 물었다.
안 괜찮다고 말해야 했다. 글쓴이와 이주노동자 분이 있는 노동자센터는 포천에 있었다. 경기도라고 적혀 있기에 1시간 반이면 갈 줄 알았다. 내 생각은 실제 거리보다 1시간 짧았다. 두시간 반이나 걸려 포천에 도착했다. 포천시외버스터미널에서 글쓴이를 만났다. 그는 이주노동자센터에서 근무하는 성공회 부제님이었다. 그 분 차를 타고 이주노동자분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주노동자 분은 인도의 종교인 ‘시크’교 사원에 살고 있었다.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영어, 한국어 둘 다 조금씩만 할 줄 알았다. 대신 그 곳의 대장(?)인 분이 통역을 해주었다. 대장님은 재미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도 물품 수입 사업을 하며 이주노동자 공동체를 이끌고 있었다. 한국 생활 8년차 답게 한국말을 정말 잘했다. 사투리를 쓰는 내가 표준어를 배워야 할 판이었다. 내가 집으로 돌아갈 때 빨리 갈 수 있는 교통편도 알려주었다.
그에게 다친 이주노동자분의 근황을 들었다. 시크교 사원에서는 어떤 국가나 종교의 이주노동자도 숙식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도 사람들이 네다섯 명 있었다. 1층은 식사교제와 숙박을 하는 곳이었고, 2층은 예배당이었다. 모두가 십시일반으로 돈을 모아 그곳을 운영하고 있었다. 공동체에서 다친 이주노동자분도 돕고 있었다. 일을 못하면 생계가 막막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그곳에서 잘 지내는 것을 보니 마음이 가벼웠다.
고국에 있는 그의 가족들과 잠깐 통화를 했다. 힌디어라 거의 못 알아들었다. 그래도 말끝마다 ‘땡큐’라는 단어가 들렸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몇 푼 기부하고 생색내러 다니는 배불뚝이 사업가 같아서 민망했다. 나는 짧은 영어와 몸짓으로 인사를 받으러 온 게 아니라 친구가 되고 싶어서 왔다고 말했다.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앉아 있던 내내 말이 안 통했지만 이 한마디만큼은 꼭 이해했으면 좋겠다.
부제님이 의정부까지 차를 태워줬다. 같이 저녁도 먹었다. 자연스레 성공회와 이주노동자에 관한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분이 살아온 이야기도 흥미진진했다. 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또 다른 세상을 만나는 것이라고 한다. 그 날 나는 이주노동자 분, 노동자센터 대장님, 부제님이라는 각각 다른 세 가지 세상에 다녀왔다. 성공회, 시크교, 이주노동자 공동체 등 낯선 것으로 가득한 곳이었다. 먼 곳에 여행을 가야만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것은 아니었다. 낯선 세상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도 있었다.